﻿<?xml version="1.0" encoding="utf-8"?><rss version="2.0"><channel><title>오마이뉴스 - 문화</title><link>https://www.ohmynews.com/</link><language /><description /><copyright>Copyright (c) OhmyNews.com All rights reserved</copyright><lastBuildDate>2026-08-18T14:28:08+09:00</lastBuildDate><item><author>박형숙</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언제든 괴물로 돌변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경고 메시지]]></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175</link><pubDate>2026-08-18T14:25:36+09:00</pubDate><description><![CDATA[여름에 가장 좋은 피서법은 미술관에 가는 것이다. 층고가 높은 전시실 안,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앞에 하릴없이 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서서 시간을 잊는 것이다. 주변의 소음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 앉고, 눈앞 희디흰 벽 위에 걸린 고풍스러운 액자 속 그림만이 오롯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림과 나 사이에 내려앉는 낯선 느낌을 바라보는 거다. 어쩌면 시(詩)가 찾아올지 모른다. 뜻밖에 신(神)의 손길을 느낄지도.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깊은 침잠의 시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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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얼마 전 고야 전시회의 티켓을 예매했던 이유는 찾지 못하겠다. 고야는 좋아하는 화가도 아니었고, 딱히 떠오르는 그림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초상화 속 그의 모습은 재상(宰相)의 이미지랄까? 내가 상상하던, 고뇌하는 예술가의 이미지와는 멀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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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는 동안 생각에 잠겼다. 프란시스코 고야. 성당 천장의 종교화, 풍속화, 로코코풍의 화려한 궁정, 귀족이나 재력가의 초상화, 전쟁, 어둠과 괴물……. 두서 없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서로 모순될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이질적인 인격이 거칠게 뒤섞여 있는 느낌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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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131"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4/IE003659131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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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 전시회 포스터에 있는 문장이다. 그것을 직접 보여주려는 듯 전시실 내부는 어둡고 비좁았다. 그리고 사람이 많았다. 좁은 전시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어깨는 수시로 부딪쳤고 사람들 입에서 이런저런 불만 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좁은 전시실에 다닥다닥 걸어 놓은 그림들은 복제화, 미디어아트, 그리고 어두운 조명 아래 몇 개의 기둥을 빽빽하게 채운 판화뿐. 원화는 한 점도 없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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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라니. 우리는 언제부터 원화를 그토록 갈구하게 된 것일까? 손바닥만한 삼중당 문고의 표지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책받침, 달력, 작은 엽서 등에 새겨진 화질이 나쁜 복제화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던 때가. 하지만 우리의 미적 욕구는 이제 그런 가짜로는 달래지지 않는가 보다. 아니, 복제가 판치는 세상이 되어 진품이 그만큼 더 소중해진 것일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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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전시회에 원화가 없다는 원성이 인터넷에 자자했다. 그렇지. 이왕이면 원화를 보아야지. 붓 터치와 물감의 질감 속에 화가의 개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프린트로 색깔이 변형되지 않는, 붕어빵처럼 똑같은 크기로 찍어낸 게 아니라 본래의 크기 그대로인 원화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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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거기에는 고야의 그림이 그 어느 미술관보다 많다고 했다. 어디 고야뿐이랴.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라파엘로, 보스... 과연, 첫 방에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하지만 0층(우리의 지하층)과 1층, 그리고 2층의 복잡한 미로 같은 방들 사이를, 안내 지도에 적힌 방 번호와 문틀 위에 박힌 방 번호를 대조하며 걸어 다니는 사이, 그 감동은 차츰 피로감으로 바뀌고 말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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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2층에서부터 거꾸로 내려왔었던가? 그 기억조차 불분명하다. 뭐랄까. 백여 개가 되는 전시실을 돌아다니는 동안 시각이 온통 마비된 듯했다. 하나의 인상 위에 다른 인상의 겹침이 반복, 반복된 끝에 하얗게 된 인상. 지금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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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잘못된 꿈을 일깨우기 위한 그림들</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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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tem><item><author>김은식</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신생팀 도루왕에서 방출되기까지... 팬들에겐 가슴 짠한 선수]]></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065</link><pubDate>2026-08-18T07:17:41+09:00</pubDate><description><![CDATA[절대 잊을 수 없는 오랜 친구들이란, 대개 좋은 일보다는 나쁜 짓을 함께 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함께 밤새워 공부했던 친구보다 함께 '야자를 째고'(야간 자율학습에서 몰래 빠져나가고) 떡볶이를 먹던 친구들과의 기억이 깊고 생생하다. 또 좋은 곳에서 비싼 음식을 함께 먹은 이들의 기억은 그 음식 뒤로 덮이지만 함께 배를 곯다가 찌그러진 냄비에 나무젓가락 뒤섞으며 라면 가락을 건지던 사람의 체취는 지워지지 않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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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팀의 팬으로 나이 먹어간다는 것은, 그 팀의 이름으로 쌓여가는 세월의 기억에 묶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중 함께 웃은 기억들보다 훨씬 질기게 마음을 묶는 고단하고 애틋한 순간들의 기억에 점점 더 세게 붙들린다는 의미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기에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애틋한 기억을 남긴 후발구단들의 팬들은, 그래서 적더라도 단단하게 엮여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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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의 9번째 구단 NC 다이노스의 팬들에게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은 그래서 짧지만 두텁다. 그 시간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누구나 집행검을 뽑아 들고 함께 크게 웃었던 첫 우승의 순간, 그리고 그 순간과 겹쳐 떠오르는 양의지와 나성범과 구창모의 모습들에 대해 몇 시간은 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일이 이제는 꽤 드물어졌다고 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그 못지않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름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김종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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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함께 굶주렸던 시간의 이름, 김종호</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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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941"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3/IE003658941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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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는 빠른 발과 나쁘지 않은 타격 감각을 가졌지만, 약한 어깨와 부실한 내구력이라는 문제를 가진 선수였다. 더구나 그가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한 삼성에는 그와 비슷한 장점을 가진 선수가 넘쳐났다. 리그 전체를 통틀어도 최고의 1번 타잣감으로 꼽힐 만했던 배영섭과 오정복이 있었고, 그 둘만 아니었다면 정형식과 이영욱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테이블세터 외야수로 자리 잡을 만했다. 그래서 군복무 기간을 포함해 4년간 1군 무대를 구경도 하지 못했고, 5년 차가 되던 2011년에 간신히 단 한 번의 타석을 경험했을 뿐이었다. 또 그 이듬해에도 대수비와 대주자로 22경기에 출장한 것이 전부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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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013년부터 신생팀 NC 다이노스가 리그에 참가했고, 그 팀의 지휘봉을 김경문 감독이 쥐게 된 것은 김종호에게 행운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김경문 감독은 선수의 강점을 높이 산다는 강점과, 선수의 약점을 다루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동시에 가진 지도자다. 그런 김경문 감독이 뚜렷한 강점을 가진 김종호에게 특별지명권을 사용할 때 그가 가진 뚜렷한 약점을 개의치 않은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일 수도 있었지만, 이 팀은 그 정도 약점은 별로 눈에도 띄지 않을 사정의 신생팀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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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상무 시절을 포함해 6년을 2군에서 보내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나이 서른을 앞두고 있던 김종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을 그라운드에 쏟아냈다. 다이노스의 첫 번째 리드오프가 되어 팀과 자신의 첫 시즌에 나선 그는 시즌 내내 3할을 오르내린 정교한 타격으로 상대 팀 마운드를 긴장시켰고 무려 50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쉼 없이 균열을 만들었다. 그 50개의 도루는 그해 리그에서 가장 많은 것이었고, 그는 다이노스가 배출한 첫 타이틀홀더가 됐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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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도, 또 그다음 시즌도 비슷했다. 그는 부지런히 치고 나가서 달렸고, 중심타선의 나성범과 더불어 상대 투수들이 그나마 다이노스를 상대로 긴장을 풀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2014년에는 어깨 부상이 겹치며 다소 부진했지만 2015년에는 .295의 타율에 41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자신의 안정적인 능력치가 어디까지인가를 입증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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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 시즌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김종호는 조금 독특한 선수였다. 선구안이 아주 정교하지는 못한 선수가 끝까지 공을 고르려는 집념을 놓지 않았고, 출루하게 되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늘 2루를 노린다는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또 수비에서는 조금이라도 강한 공을 내야로 보내기 위해 한 걸음 더 도움닫기를 하고 온몸의 회전력을 짜냈다. 하지만 그래봐야 별 효과가 없는 듯한 가소로운 궤적의 공이 나갔기에, 팬들은 함부로 비난조차 할 수 없어 입맛을 다시곤 했다. 안타가 된 공을 주워 던지는 일에 자신이 없어 그랬던지, 빠른 발을 이용해 끝까지 따라가며 몸을 던져 걷어내는 다이빙캐치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멋있지만 위태로운 그의 장기였다. 그는 꽤 잘하는 선수였고, 참 열심히 하는 선수였지만, 뭔가 뚜렷이 비어 있는 선수였고 그럼에도 원망할 수 없는 묘한 선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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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tem><item><author>노시은</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찜기에서 푹 쪄낸 옥수수와 어울리는 마실 것]]></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678</link><pubDate>2026-08-17T17:34:53+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324"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2/IE003658324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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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나고 하늘이 좀 높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햇살이 여전히 따가운 늦여름의 한낮입니다. 맹렬하게 끓어오르던 무더위도 이제 서서히 마지막 고비를 넘네요. 다시 활짝 연 창문과 선풍기만으로 버틸 만해졌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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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유독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오후였습니다. 커다란 수박 한 통을 쩍 갈라 쟁반에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온 가족이 둘러앉았죠.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 물이 턱을 타고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수박을 베어 무는 조카들을 보며, 엄마는 불쑥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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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996633'>"할머니 어릴 적에는 말이야, 동네 언니 오빠들이랑 밤에 몰래 수박 서리를 하러 갔었어."</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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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서리'라는 낯선 단어에 조카들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어머니의 무용담은 꽤나 흥미진진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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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수박 옛 그림 두 점</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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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죽여 수박밭에 기어들어가 가장 크고 잘 익어 보이는 놈으로 하나를 골라 품에 안았는데, 그만 밭주인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는 겁니다. 혼비백산하여 컴컴한 논둑길을 내달리다 그만 발이 꼬인 오빠가 넘어졌고, 품에 안고 있던 귀한 수박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죠.<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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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수박은 한 입도 못 먹고, 언니 오빠들보다 느렸던 엄마만 주인 할아버지에게 붙잡혀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혼자만 뒤집어 쓴 건 둘째 치고 산산조각 난 수박의 붉은 속살이 아까워 펑펑 울었다는 대목에서 온 가족이 박장대소를 터뜨렸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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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수박의 단맛과 까르르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엄마의 정겨운 옛날이야기가 어우러져 가장 완벽한 여름날의 풍경을 만들어냈죠. 그날의 달콤했던 수박 파티를 떠올리며 창밖의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조선시대 화가들이 남긴 수박 그림 두 점을 나란히 끌어다 놓았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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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321"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2/IE003658321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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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678">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최미향</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쇠퇴하면 안 되죠"... 열 번째 축제 맞은 서산 '박첨지' 축제]]></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628</link><pubDate>2026-08-17T14:29:39+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928"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6/IE003659928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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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996633'>"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와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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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오후, 박첨지놀이전수관에서 충청남도 무형유산 제26호 서산박첨지놀이 보유자인 이태수 서산박첨지놀이보존회장에게 5년 전 했던 걱정을 다시 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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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333399'>[관련기사] 2021년 "창시자 외조부 뜻 이어받아 박첨지 성장시키고 싶어" </font><a target="_blank" href="https://omn.kr/1s961"><font color='#333399'>https://omn.kr/1s961</font></a><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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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당시 그는 박첨지놀이의 미래를 걱정했다. 서산시 음암면 탑곡4리는 54가구가 사는 작은 농촌마을이었고, 보존회 회원은 정회원 9명과 준회원 4명 등 13명이 전부였다. 이 가운데 80대를 넘긴 회원도 3명이었다. 농촌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마을 주민들이 함께 해야 가능한 박첨지놀이가 앞으로도 순조롭게 이어질 수 있을지 불안하다고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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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5년. 다시 물은 질문에 돌아온 첫 대답은 의외로 밝았다. 현재 보존회는 정회원 8명과 준회원 7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 보유자는 준회원 7명을 두고 "이제 배우는 친구들"이라고 설명했다. 새롭게 참여한 이들 역시 대부분 탑곡리와 인연을 맺고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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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숫자가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5년 전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 때문에 걱정했던 마을에 새로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은 작지 않은 변화다. 그리고 오는 9월 5일, 이들이 지켜온 박첨지놀이는 열 번째 인형극축제를 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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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엄마 등에 업혀 보던 인형극, 이제는 그가 지킨다</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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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보유자에게 박첨지놀이는 처음부터 '무형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2021년 인터뷰에서 그는 아주 어릴 적 어머니 등에 업혀 박첨지놀이를 봤다고 했다. 농사일을 마친 마을 어른들이 저녁이면 풍물을 치며 모였고, 날이 어두워지면 횃불을 밝혔다. 어린 이태수는 인형극을 보며 깔깔 웃다가도 구렁이가 등장하면 겁을 먹고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곤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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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첨지놀이 초대 전승자인 고 주연산 선생은 그의 외조부다. 그러나 외조부가 평생 지킨 놀이였다고 해서 손자가 곧바로 그 길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고향을 떠나 생활하기도 했고, 다시 탑곡리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은 박첨지놀이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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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박첨지놀이를 이어갈 사람이 줄어드는 현실이었다. 박첨지놀이는 몇 명의 전문 배우만으로 완성되는 공연이 아니다. 인형을 움직이고 소리를 하고 풍물을 치는 사람들이 함께해야 한다.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이 시간을 내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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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본격적으로 전승에 뛰어들 무렵만 해도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공연에 함께하자고 주민들을 찾아가면 "야 이 사람아, 그거 하면 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 "먹고사는 게 먼저 아니냐"는 답이 돌아오곤 했다. 농사와 생업이 우선인 주민들에게 공연 참여를 부탁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던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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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회장은 1995년 2대 보유자 고 김동익 명인에게 들어가 본격적으로 박첨지놀이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삼십 대였던 그는 "이것은 돈 보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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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0여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이태수씨는 이제 서산박첨지놀이 3대 보유자로 전승의 중심에 서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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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통화에서 보유자가 된 뒤 달라진 점을 묻자 그는 "전수관도 갖춰져 있고 기반은 잘돼 있지만, 이제는 더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무게감이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 등에 업혀 바라보던 마을 인형극을 이제는 자신이 다음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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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628">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최옥화</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여행자의 시선으로 본 대구근대역사관과 이인성 갤러리]]></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453</link><pubDate>2026-08-17T13:56:40+09:00</pubDate><description><![CDATA[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내고 결혼 후 수도권으로 떠난 친구가 수십 년 만에 대구로 여행을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하루 동안 어디를 구경시켜 주어야 할지 고민이 커졌다. 날씨가 선선하다면 산이나 야외 명소를 찾으면 되겠지만, 35도를 웃도는 가마솥 더위 속에 마땅한 야외 일정을 잡기란 불가능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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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중구 근대골목의 실내 전시관 두 곳을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마침 친구의 전공이 역사학인 점을 고려하여 대구근대역사관과 지난해 새로 개관한 예술체험공간 아루스 이인성갤러리를 코스로 정했다. 친구가 머무는 게스트하우스 앞 경상감영에서 반가운 재회를 하며 일정을 시작했다.<br>
여행자의 시선으로 보는 대구는 어떤 도시일까? 궁금했는데 친구도 대구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마주 앉아도 어색함이 없다는 것, 그것이 오래된 우정의 힘인가 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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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대구근대역사관</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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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648"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5/IE003659648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대구근대역사관 건물은 본래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었으며, 1954년부터는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사용된 곳이다. 르네상스 양식의 조형미가 뛰어난 건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광역시가 2008년 대구도시공사로부터 기증받아 2011년부터 근대역사관으로 운영하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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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상설전시실과 2층 기획전시실, 체험학습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과거 식산은행 시절의 금고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직접 둘러볼 수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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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서는 대구 읍성과 경상감영에 관한 기록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흔적만 남아 있는 대구 읍성이 만약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면 대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역사 관광지가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일제 침략 이후 대구 도심은 일본인 중심의 상권으로 변모했는데, 전시 문안과 모형, 영상을 통해 일제의 내륙 침탈 과정과 근대 도시로 변화해 간 모습, 국채보상운동 등 대구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마릴린 먼로가 대구를 방문해 주한미군을 대상으로 위문공연을 펼쳤던 사진도 눈길을 끌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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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달성학교, 1906년 계성학교, 1907년 신명여학교 등 근대 교육기관의 활동 모습이 담긴 졸업장, 학습지도안, 교과서, 일기장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오래 머물렀다. 교단에서 마흔 해를 보낸 사람에게 이런 기록들은 그저 옛 자료가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진 시간의 지층처럼 느껴진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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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의 끝자락에서는 대구에서 성장한 '삼성'과 상업도시의 발전 과정을 보게 된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삼성의 뿌리가 대구 삼성상회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느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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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었던 공간은 1층 중앙의 원형 형태인 '근대 대구의 문화' 코너였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과 2·28 민주운동의 항일정신뿐만 아니라, 이상화·현진건·백기만 등 근대문학의 작가들, 박태준·현제명의 음악, 김진만·이인성·이쾌대의 미술이 피어난 근대 문화의 산실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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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는 개관 15주년 특별기획전 〈꺼지지 않는 불꽃, 대구 학생 항일운동〉(2026.6.9.~11.29.)이 열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 중등학생들의 항일운동을 조명한 전시로, 각 학교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짚어보는 의미 있는 기획이다. 또한 유물 기증의 가치를 알리는 작은전시 〈'퇴근길의 위로'를 모으다〉(10.5.까지)에서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월급봉투, 소주병, 버스토큰 등 추억의 물건들을 만나볼 수 있어 감회가 새롭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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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647"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5/IE003659647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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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예술체험공간 아루스 이인성갤러리</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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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방문한 예술체험공간 '아루스'는 이인성 화백이 1937년 대구에서 운영했던 '순다방 아루스'를 모티브로 조성된 공간이다. 1층과 2층에 걸쳐 회화 감상부터 미디어 전시, 체험 프로그램까지 이인성 화가의 작품 세계를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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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 아치를 지나 내부로 들어서면 "무한의 캔버스, 삶과 예술을 담다 1912-1950" 미디어가 이인성 화백의 생애를 압축하여 보여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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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453">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사)한국작가회의</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육신 회복... 초자연적 위력을 가진 신발]]></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075</link><pubDate>2026-08-17T11:26:22+09:00</pubDate><description><![CDATA[<font color='#333399'><strong>내가 신봉하는 유일신</strong></font><br>
<font color='#333399'>- 고철</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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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333399'>신발 때문에 편해졌다</font><br>
<font color='#333399'>생활이 덕분에 윤택해졌다</font><br>
<font color='#333399'>신발 때문에 밥 먹고 산다</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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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333399'>신발을 끌고 공장에서 돌아왔다</font><br>
<font color='#333399'>저녁 먹고 신발을 끌고 산책했더니</font><br>
<font color='#333399'>나의 육신이 회복되었다</font><br>
<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075">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최해린</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귀신, 살인마 보다 무서운... 40년 시달린 공포의 실체]]></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7926</link><pubDate>2026-08-17T11:00:10+09:00</pubDate><description><![CDATA[여름만 되면 스스로에게 '이 여름, 이겨낼 수 있을까'라고 되묻는다. 겨울의 추위는 견디기만 하면 되는데, 어째서인지 여름의 열기와는 싸워서 이겨야 할 것만 같다. 아침저녁으로는 많이 선선해졌지만, 오후의 뙤약볕은 여전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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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은 물론 대학 생활까지 전부 첩첩산중에서 보내며, 유독 여름이 무서웠다. 누군가 따라오는 듯한 감각에 숨죽이고 하교하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고라니를 마주치고 깜짝 놀랐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체육관에 올라가는 길목에서 씩씩거리는 멧돼지와 눈이 마주쳐 기겁할 뻔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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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생명체를 만날 때마다 공포스러웠다. 순간적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하는 내게 놀라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균형도 못 잡는 내가 산짐승과 싸워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예견된 패배다. 그런데도 생존 본능 때문인지 눈앞의 위협을 만났을 때 '싸움'을 떠올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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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아찔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나면, 싸움을 각오했던 스스로의 비장함이 무섭게 느껴졌다. 이성이 아니라 순간적인 감정을 쫓으려 한 내 자신에게 놀랐다. 그때, 순간적인 판단을 따랐다면 어땠을까. 몸의 어딘가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았거나 지금 이 자리에서 감상을 남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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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험 때문인지 내가 여름에 무서워하는 건 귀신이나 초자연 현상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 위협 상황에 인간은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또 그 선택이 얼마나 많은 걸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하면 어느새 서늘해진다. 매 여름, 인간의 마음을 다룬 호러 영화 &lt;할로윈(2018)&gt;을 보는 이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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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쫓기는 공포에서 쫓는 공포로</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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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7190"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0/IE003657190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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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할로윈(2018)&gt;은 호러 장르의 전설적인 작품이 된 &lt;할로윈&gt;의 후속 작품이다. 데이비드 고든 그린 감독은 연쇄살인마에게 살아남은 지 40년 된 주인공 '로리 스트로드(제이미 리 커티스 분)'의 심리적 변화에 집중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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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기존 호러 영화와는 다르다. 전통적인 '살인마 호러'는 관객이 쫓기는 쪽에 이입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함께 등장하던 주인공 일행이 하나둘씩 살인마의 손에 죽어가고, 최후의 생존자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영화가 계속되는 식이다. 악령이나 악한과 대결해 유혈이 낭자한 사투를 벌이다 마지막에 생존하는 이는 대개 여성이다. 그래서 서구영화사에서 이러한 스토리의 공포영화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여성을 '파이널 걸'(final girl)이라고 부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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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걸을 비롯한 공포 영화 주인공들은 영화 내내 '살아남으려' 애쓴다. 살인마가 화면 너머의 관객마저 죽일 것만 같은 공포를 전달하는 동안 주인공은 무력하게 그려진다.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주저앉아 울거나, 중요한 순간에 길을 잘못 드는 등 번번이 실수해 관객이 가슴을 치게 만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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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7926">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윤한샘</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세계에서 가장 긴 술집'에 놀라고, 쌍둥이맥주에 놀라고]]></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085</link><pubDate>2026-08-16T19:58:30+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975"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4/IE003658975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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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으로 향하는 길, 쭉 이어진 도로를 사이에 두고 술집과 레스토랑이 끝없이 줄지어 보였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뒤셀도르프가 이렇게 발랄했었나? 나의 기억엔 작고 조용한 도시였는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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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끈 것은 분위기뿐만 아니었다. 아이리시 펍, 뮌헨 펍, 브라질 레스토랑처럼 다국적 음식점들이 양 옆으로 즐비했다. 그 순간, 베를린이 떠올랐다. 물론 메트로폴리탄, 베를린과 뒤셀도르프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긴 하지만 다른 독일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개방성과 다양성은 베를린 외에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것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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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뒤셀 강의 어촌 마을, 뒤셀도르프</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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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에서 쾰쉬를 마셨으니, 다음은 뒤셀도르프의 알트를 만날 차례였다. 쾰른에서 40km,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뒤셀도르프는 원래 작은 어촌이었다. 어원 또한 '뒤셀 강의 마을'이라는 의미다. 별 볼일 없던 이 도시가 역사 속에 등장한 계기는 다름 아닌 쾰른 상인들이 대주교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벌였던 보링엔 전투 때문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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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 대주교에 맞서 싸웠던 진영에는 상인뿐만 아니라 귀족도 있었다. 라인 강 동쪽에 위치한 베르크 지역의 백작 아돌프는 쾰른 대주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13세기 보링엔 전투에서 상인들 편에서 함께 승리한 후, 그가 새로운 거점으로 키운 도시가 바로 뒤셀도르프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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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후, 백작령이었던 베르크가 공국으로 승격되며 뒤셀도르프는 라인란트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점차 봉건 영지의 행정, 사법의 중심지로 떠오른 뒤셀도르프는 18세기에는 문화 예술의 도시로 명성을 날렸다. 게다가 19세기에는 루르 공업기지로서 금융 자본이 몰렸고 20세기 들어서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주도로 지명되기도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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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금융, 심지어 주도까지 작은 어촌 마을에게 내어주자 쾰른 시민들은 배가 아팠다. 아니, 박탈감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이후, 쾰른과 뒤셀도르프는 때론 직설적으로 때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경쟁의식을 드러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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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격렬하게 서로를 조롱하는 장은 축구였다. FC쾰른과 포르투나 뒤셀도르프가 맞붙는 날이면 라인 강이 들썩이고 출렁였다. 도시 축제에서는 서로를 놀리는 다양한 구호와 조형물이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경쟁심이 표출되는 분야는 바로 맥주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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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쉬와 알트, 나 같은 동양인조차 두 맥주를 마실 때면, 두 도시의 자존심과 경쟁심 그리고 자부심이 폐부까지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희한하다. 서로의 맥주를 미워하고 조롱함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엔 비슷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많은 것을 공유하는 이란성쌍둥이처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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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피부색만 다른 이란성쌍둥이</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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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트(Alt)는 뒤셀도르프의 맥주다. 적갈색을 띠고 투명하다. 4.5~5% 알코올에 섬세한 건자두 향, 옅은 쓴맛, 가벼운 바디감, 깔끔하고 청량한 목 넘김까지 가지고 있어 마시기 편한 녀석이다. 겉모습만 보면, 알트는 쾰쉬와 완전 다르다. 그런데, 이면을 살펴보면 색만 다르지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아니 거의 동일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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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양조방식이 같다. 쾰쉬가 상면발효를 한 후, 저온숙성을 하는 것처럼, 알트도 똑같은 양조과정을 거친다. 조금 더 진한 맥아를 사용해서 색만 다를 뿐, 다른 특징은 유사하다. 서빙방식도 동일하다. 맥주 서버 쾨베스, 원통 형 맥주잔, 맥주를 담는 크란츠, 그리고 주문하지 않아도 다 마시면 맥주를 가져다주는 관습까지, 완전 쌍둥이다. 다른 점은 쾰쉬가 200ml 용량이라면, 알트는 250ml로 나온다는 정도뿐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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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 맥주로 자존심과 경쟁심을 표출하면서 왜 알트와 쾰쉬는 이리도 비슷한 걸까? 그 답은 두 맥주의 탄생 배경에서 유추할 수 있다. 19세기 라거 맥주가 독일을 휩쓸면서 뒤셀도르프 전통 맥주, 코이테비어(Keute)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밀이 들어가고 상면발효를 한 이 전통 맥주는 청량한 황금색 라거에 비하면 투박하기 그지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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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라거의 위협에 가장 먼저 대응한 사람이 마티아스 슈마허였다. 1838년 슈마허(Schumacher)는 뒤셀도르프 전통 맥주를 라거처럼 저온숙성 시켰다. 그리고 추가적인 시험을 통해 현재 알트의 원형에 가까운 맥주를 선보였다. 상면발효 후 저온숙성, 우리가 쾰쉬에서 알고 있는 이 방식을 최초로 시작한 곳은 쾰른이 아니고 뒤셀도르프였던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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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085">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이영천</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다소 황당한 이유로 파헤쳐진 광화문 사거리]]></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160</link><pubDate>2026-08-16T19:56:59+09:00</pubDate><description><![CDATA[언젠지 모르게 우리 발길이 공중과 땅 밑으로 떠밀려 강제되었다. 그때 도로는 더는 발길을 받아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신호를 기다려 건널목을 건너는 대신, 육교와 지하도로 길을 건너야 했다. 육교는 시청 부근이, 지하도는 세종대로 사거리(옛 광화문 사거리)가 시작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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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123"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4/IE003659123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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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에 비례하여 자동차가 늘었다. 차가 빨라지고, 인프라가 다듬어지면서 차와 사람 사이 교행 규칙이 엄격히 구분되었다. 어지간한 교차로엔 신호등이 걸음을 붙잡았다. 길을 건너려면 기다려야 했다. 그랬어도 교차로마다 작은 낭만이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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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4월, 서울시장이 '교통난 완화책'을 발표한다. 도로와 지하도, 육교를 건설하고 전차 폐지와 지하철을 건설하겠다는 게 골자다. 이로써 육교나 지하도가 무수히 계획된다. 일종의 통제장치다. 육조거리와 세종대로 사거리의 광장이 넓혀졌어도, 걸음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4.19와 5.16이 격랑으로 지나며 강제가 시작되었다. 그랬어도 느린 전차에 보차혼용이 일상 풍경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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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125"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4/IE003659125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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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세종대로를, 1966년 10월 방한하는 존슨 대통령 환영 시가행진 때문에라도 단장해야 했다. 전차 궤도가 뜯기고 사거리에 9월 30일 지하도가 뚫린다. 지상은 통제되고, 계단을 내민 지하도가 걸음을 재촉한다. 조금만 내려가도 희미한 전등에 기대야 했다. 차 소리보다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침침한 지하도는 공기도 습했다. 반대로 땅 위는 더욱 빨라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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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128"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4/IE003659128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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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보다 육교가 더 우후죽순이었다. 처음엔 구경거리였던 게 차츰 억지처럼 여겨진다. 무단횡단이 빈번해진다. 왜 오르고 내려가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는 분명 도시가 강요한 행위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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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은 차량 공간이니, 사람은 육교와 지하도로만 다니라는 정해진 위계였다. 모든 게 속도로 흘렀다. 그렇다고 사람이 사라진 건 아니다. 빨라진 도로에 느린 발걸음이 공중과 지하로 돌려졌을 뿐이다.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지하도는 발걸음만 돌려세운 게 아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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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먼지 날리는 일상</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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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380만인 1966년, 모 일간지에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가 연재되고 있었다. 도성 일원과 영등포에 한정했으니 만원이라 할 만하다. 절대적 증가보다 사회적 증가세가 두드러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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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600만 명을 넘겼으니, 가히 놀라운 속도다. 무섭게 증가하는 인구를 수용할 도시계획은 체계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즉흥 계획이 난무했다. 그 시절 서울은 파헤쳐진 흙에 먼지 날리는 뿌연 일상이었다. 삽과 곡괭이, 덤프트럭과 불도저의 소음, 비포장도로를 거칠게 구르는 바퀴 소리가 시대의 배경음악처럼 도시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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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라는 서울시장 지휘 아래, 도시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다. 넓어진 길은 미래로 포장되었고, 직선으로 뻗은 도로는 무한 확장하는 근대처럼 보였다. 교차로에 멈춰서는 차의 시간을 단축해내는 걸 숙제로 여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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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126"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4/IE003659126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130"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4/IE003659130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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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철학이 가장 또렷하게 구현된 장소가 세종대로와 시청, 명동 입구다. 서울의 얼굴이라는 곳부터 땅과 지하, 공중으로 갈렸다. 명확히 나뉜 사람과 자동차의 위계다. 그건 단순한 교통 개선이 아닌, 도시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였다.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을 양보해야 하는가의 지표였다.<br>
<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160">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최미향</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축제장에서도 싸게 먹을 수 있어야죠" 서산서 '한새우 페스타']]></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510</link><pubDate>2026-08-16T11:10:47+09:00</pubDate><description><![CDATA[<font color='#996633'>"사료값과 인건비, 전기요금이 계속 오르면서 생산비 부담이 커졌습니다. 새우 가격까지 오르면 결국 소비도 위축될 수밖에 없죠.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 조금이라도 부담을 낮춰보자는 겁니다."</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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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에서 새우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먹거리 축제가 열린다. 중간 유통단계를 줄여 소비자는 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국내산 새우를 즐기고, 생산자는 직접 판로를 넓히는 직거래 방식의 축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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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서산 한새우 페스타'가 오는 9월 12일과 13일 이틀간 서산시 성연면 여름테마파크 주차장 일원에서 열린다. 행사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이며, 개막식은 12일 오전 11시에 진행될 예정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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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사를 준비한 이기봉 (사)한국새우양식총연합회 회장은 지난 1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축제장에서 새우를 가장 저렴하게 먹고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착한 가격, 착한 소비'의 직거래 장터가 이번 행사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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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생산비 오르고 소비자 가격도 부담... "유통단계 줄여야"</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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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이 직거래 축제를 구상한 배경에는 최근 새우 양식 현장의 생산비 상승이 자리하고 있다. 새우 양식에 필요한 사료비와 인건비, 전기요금 등이 오르면서 생산자의 부담이 커지고, 이는 다시 출하가격과 소비자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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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생산비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료값과 인건비, 전기요금이 올해도 올랐다"며 "첫 출하단가가 3만5000원까지 올라가면서 소비자가 실제 구입할 때는 4만5000원에서 5만 원까지 줘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고 설명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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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가격이 계속 올라가면 소비가 부진해질 수밖에 없다"며 "중간 유통단계를 최대한 줄이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면 생산자는 판로를 확보하고 소비자도 가격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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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생각하는 직거래의 기준도 분명하다. 시중 판매가격보다 최소 5000원 이상은 낮아야 소비자가 직거래의 장점을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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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일반 소비자가 3만5000원에 구입하는 새우라면 직거래에서는 3만 원 정도가 돼야 하고, 시중 가격이 3만 원이라면 2만5000원 정도는 돼야 한다고 본다"며 "축제에 왔는데 평소와 가격 차이가 없다면 직거래의 의미도 줄어든다"고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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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페스타가 '싸게 파는 행사'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 새우를 키운 생산자가 직접 소비자를 만나 자신이 생산한 새우를 소개하고, 소비자는 생산자를 통해 국내산 양식새우를 접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도 행사의 취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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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지역 새우 양식장에서는 출하시기가 다가오면 흰다리새우를 그물로 건져 올리고 선별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넓은 양식장에서는 수차가 쉼 없이 돌아가며 물속에 산소를 공급한다. 소비자에게는 마트나 음식점에서 쉽게 만나는 새우지만,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키웠는지 직접 접할 기회는 많지 않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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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축제는 그 생산 현장과 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좁혀보겠다는 시도이기도 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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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710"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5/IE003659710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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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한우·한돈처럼... 국내산 양식새우 이름은 '한새우'</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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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510">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김동근</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20년 만에 돌아온 남편,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의외의 존재]]></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964</link><pubDate>2026-08-16T10:52:42+09:00</pubDate><description><![CDATA[<font color='#333399'>(*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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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싸움을 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보다 앞서기 위해 경쟁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기도 한다. 꼭 악의를 가지고 하는 행동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혹은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누군가와 부딪힌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마음 한쪽이 불편해지는 날이 있다. 조금 심하게 말했던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가 내린 선택 때문에 상처받았을 누군가를 생각하기도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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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작은 선택에도 죄책감이 남는다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선택을 내려야 했던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누군가의 결정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전쟁을 결정한 사람들은 그 죽음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밤마다 자신이 내린 결정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할까. 영화 &lt;오디세이&gt;를 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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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전략가 오디세우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보여주는 그의 긴 귀환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는 모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돌아가기가 두려웠던 건 아닐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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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333399'><strong>[첫 번째 감정] </strong></font><strong>오디세우스의 죄책감</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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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784"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3/IE003658784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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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맷 데이먼)는 영웅이다. 뛰어난 전략가였고, 오랫동안 이어진 트로이 전쟁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 역시 그의 지략을 상징한다.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이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이타카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귀환에는 다시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집 주변을 돌고 돌아 수많은 죽음과 고통을 다시 경험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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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긴 시간이 죄책감처럼 느껴진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승리를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적군만 죽은 것도 아니다.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동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자신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그 죽음들 앞에서 그는 계속 선택해야 한다. 누구를 살릴 것인지, 누구를 포기할 것인지. 전략가에게는 하나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에는 언제나 사람의 목숨이 놓여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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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어쩌면 집에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타카에는 너무나 사랑하는 페넬로페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쟁터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다시 바라봐야 한다. 가족이 기억하는 남편과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겠지만, 전쟁터의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기도 했다. 영웅의 모습으로 귀환하고 싶었겠지만, 자기 눈에는 피를 뒤집어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을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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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면 영화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그의 방황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신들이 그의 앞길을 막고, 바다는 거칠어지고, 괴물과 죽음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온다. 그것은 신들의 저주이면서 동시에 오디세우스가 스스로에게 내린 벌처럼 느껴진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마음속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몸은 트로이를 떠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오디세우스에게 필요했던 10년은 이타카까지 가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가족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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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333399'><strong>[두 번째 감정] </strong></font><strong>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의 믿음</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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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785"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3/IE003658785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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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가 20년 동안 집을 비운 사이, 페넬로페(앤 해서웨이)는 그를 기다린다. 생각해 보면 20년이라는 시간은 믿음이라는 말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다. 살아 있다는 확신도 없고, 언제 돌아온다는 약속도 없다. 주변에는 계속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것이라는 가능성을 쉽게 놓지 않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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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단순히 사랑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페넬로페가 기억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를 무너뜨린 전쟁 영웅이기 전에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지혜롭고 강하지만 전쟁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올 사람. 페넬로페는 세상이 알고 있는 영웅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인간을 믿었던 것처럼 보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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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마코스(톰 홀랜드)의 믿음은 조금 다르다. 그에게 아버지는 기억보다 이야기에 가까운 존재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을 떠났을 때 그는 너무 어렸고, 자신이 직접 기억하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들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텔레마코스에게 오디세우스는 실제 사람인 동시에 하나의 전설이 된다. 어쩌면 페넬로페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아버지가 없는 시간을 채워줬을지도 모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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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tem><item><author>이길상</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내란 이후 얼마나 됐다고... 한국 정치는 왜 이 모양인가]]></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7481</link><pubDate>2026-08-16T10:52:17+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6361"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07/IE003656361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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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로 어수선한 세상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날씨, 주가, 부동산 정책 관련 뉴스가 쏟아지고, 백성들은 하루하루가 피곤하다. 피곤 유발자들이 모여 있는 정치권 소식도 여전히 어지럽다. 내란 사태가 해결되고, 지방선거가 끝나면 조용할까 싶었는데 여전히 짜증을 유발하는 정치 뉴스가 봇물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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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것은 '기준'이다. 온갖 현상, 인간, 정책을 평가할 때 사람마다 기준이 같을 수는 없다. 각자의 삶에서 우러나온 기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경제 분야의 핵심 이슈인 주식과 부동산 문제에 국한해서 얘기하면 너무나 명료하다. 주식 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해 불평이 많지만, 경제적 여력이 없거나 관심이 없어서 주식에 투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잡음이고, 소수의 주식 성공자에게는 못난 사람들의 한심한 넋두리일 뿐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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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관련 세제나 정책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다. 집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다른 것은 당연하다. 부동산 관련 보유세나 양도세 정책 변화는 집이 서울 강남이나 용산에 있는지, 변두리에 있는지에 따라 이해관계가 갈린다. 물론 종합부동산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수많은 지방 거주자에게는 배부른 자들의 엄살이나 투정일 뿐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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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덕분에 정권을 잡은 여당의 당권 경쟁 모습이 가관이다. 동지였던 사람들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모습이 폭염보다 심한 짜증을 유발하고 있다.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의 과거 행동, 과거 발언, 인간관계, 일거수일투족을 평가하고 시빗거리로 삼는다. 경쟁하듯이. 부끄러움 없이. 자신은 완벽한 듯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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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비난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기준 모두를 만족시킬 후보는 한 명도 없어 보인다. 어찌 보면 이들이 들이대는 기준 모두를 만족시킬 정치인은 과거에도, 현재도, 아마 미래에도 없을지 모른다. 심리학자 토드 로즈가 쓴 &lt;평균의 종말&gt;에 보면 사람들이 선호하는 미인의 기준 모두를 종합해서 몽타주를 만들었을 때, 이 몽타주를 닮은 사람을 지구상에서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가 나온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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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를 보면 마치 지구상에는 없는 만들어진 몽타주를 들고 상대편 얼굴이 몽타주와 다르다고 '너 못생겼어'라고 외치는 형국이다. 자기편 후보 얼굴도 몽타주와 다르기는 별반 아닌데도 말이다. 이런 상대편 비난하기 경쟁을 여과 없이, 간혹 부풀려서, 간혹 왜곡해서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는 더욱 한심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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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야당은 언급할 가치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헌법과 법률이 정한 기준에 따라 사법부가 '내란'이라고 규정한, 자기 집단의 헌정 파괴 행위를 옹호하려는 자와 그 덫에서 벗어나려는 자 사이의 진흙탕 싸움으로 비틀거리고 있으니 말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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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커피 맛은 지금도 변하고 있다</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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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내 기준' 따라 평가하기, '내 기준' 따라 비난하기 경쟁은 커피에 비유할 수 있다. 커피 맛은 다양하고, 커피 맛은 변해왔다. 지금도 변하고 있다. 따라서 옛날 기준으로 지금의 커피를 평가할 수도 없고, 지금 기준으로 옛날 커피를 평가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커피 취향을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추어 내가 마실 커피를 선택하는 것도 바른 태도는 아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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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커피 역사에서 커피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기준은 몇 차례 큰 변화를 보여 왔다.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는 커피를 선택할 때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준이 단순했다. 커피를 마실 것인지, 차를 마실 것인지를 선택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다방에서 커피는 하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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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에 따라 커피 가루를 물에 넣고 끓인 후 찌꺼기를 걸러서 제공하는 곳과 인스턴트커피를 뜨거운 물에 타서 내놓는 곳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 다방에서 여러 종류의 커피를 메뉴에 올리지는 않았다. 끓인 커피를 판매하는 명동 등 도심 다방이나 호텔 커피숍을 찾아갈 것인지, 물에 타는 커피(인스턴트커피)를 파는 동네 다방을 찾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면 되던 시대였다. 물론 집에서는 주로 미제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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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인스턴트커피가 생산되기 시작한 1970년 이후 1980년대 말까지는 더욱 선택이 필요 없었다. 커피는 인스턴트커피 하나로 통일되었다. 맛보다는 편리성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커피를 마실 것인지, 국가가 권장하는 국산 차를 마실 것인지 결정하면 되던 시절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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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예외는 있었다. 서울의 신촌, 혜화동 등 대학 주변, 그리고 부산대학교나 경북대학교 등 지방 대학의 주변에서는 일본에서 유행하던 사이폰 커피를 제공하는 앞서가는 업소들이 있었다. 역시 장소를 선택하는 일이었지 커피를 선택할 일은 아니었다. 커피는 커피일 뿐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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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들어서는 커피를 마시더라도 인스턴트커피와 원두커피(혹은 블랙커피) 사이에서 선택하는 시대가 열렸다. 모든 다방과 커피숍은 두 가지를 메뉴에 올렸다. 그냥 '커피'와 '원두커피'. 원두커피를 선택하면 종업원이 반드시 '블랙'으로 마실지 설탕을 넣을 것인지를 물었다. 뭔가 있어 보이려면 '블랙'이라고 대답해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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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tem><item><author>박홍순</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쾌락의 섬에 병사들의 무기가 버려진 이유]]></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409</link><pubDate>2026-08-15T20:46:50+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7852"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1/IE003657852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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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유럽에서 쾌락에 대한 사회적 경멸과 단죄가 가장 강력했던 시대였다. 르네상스는 천 년 이상에 걸친 중세의 엄숙주의 도덕률에 균열을 냈다. 현세의 즐거움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육체에서 아름다움을 찾았으며, 정신에서 감정이 차지하는 비중을 늘렸다. 아직 종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기존 중세와는 확연히 달랐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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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대혁명을 경계로 종교적 권위가 약해지면서 본능에 따른 욕구와 감정에 대한 적극성이 꽃을 피웠다. 근대 철학에서 감각과 감정의 역할, 관념적 완결성보다는 현실의 유용성, 즐거움과 만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자라났다. 예술에서는 조금 더 일찍 변화가 찾아왔다. 18세기 초중반에 프랑스 살롱 문화를 중심으로 발달한 로코코 예술 양식이 여기에 해당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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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사랑과 쾌락의 섬 키테라</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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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장 앙투안 와토(1684~1721)의 &lt;키테라섬의 순례&gt;가 새로운 경향을 잘 보여준다. 키테라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에 있는 섬이다. 유럽 문화에서 '사랑과 쾌락의 성지'로 통한다. 당시 청년층에서는 달콤한 사랑의 실현을 위해 이 섬을 순례하는 풍습이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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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테라는 그리스 신화에서 성애와 육체적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여신 아프로디테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로마에서는 비너스로 불린다. 세상을 지배하는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바다에 버렸는데 거품이 일더니 거기에서 아프로디테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보통은 여신이 처음에 도착한 섬을 키프로스로 알고 있는데, 사실 신화에 의하면 키테라가 먼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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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들의 탄생과 관계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의 &lt;신들의 계보&gt;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불사의 살점에서 흰 거품이 일더니 한 소녀가 자라났다. 그녀는 처음에 신성한 키테라로 다가갔다가 그 뒤 키프로스로 갔다." 처음 정착한 섬이 키프로스라면, 이에 앞서 처음 육지에 발을 디딘 섬이 키테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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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디테는 탄생부터 성적인 사랑과 아름다움을 대변했다. 헤시오도스는 "남근을 좋아한다고 부르는 것은 그녀가 남근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에로스와 아름다운 애욕이 태어날 때 배석했다"라고 한다. '순례'가 성지를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여행임을 고려할 때, 아프로디테의 섬 순례는 육체적 쾌락 실현을 예찬하는 의식의 성격을 갖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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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오른편 끝에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조각상에서 왼편의 배까지 순서대로 사랑이 실현되는 단계를 표현하는 여러 쌍의 인물이 등장한다. 먼저 청년이 여인에게 바짝 다가앉아 속삭이듯 관심을 표현한다. 여자도 싫지 않은 기색이지만, 살짝 몸을 돌려 부채만 만지작거려서 아직 감정이 통하기 전임을 보여준다. 아프로디테의 전령 큐피드가 사랑을 연결해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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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한 쌍은 남자가 여인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준다. 손을 맞잡고 있다는 모습은 사랑이 맺어졌음을 의미한다. 일으켜 세우는 동작이 무엇을 의미할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프로디테의 섬이고, 주변이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숲임을 고려할 때 곧 이어질 성애를 떠올리게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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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은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껴안고 배로 향한다.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는 황홀한 경험으로 연인이 된 순간이다. 순례의 목적을 이루었기에 배로 돌아가는 중이다. 여인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는 모습도 의미심장하다. 뒤를 바라보는 행위는 기억을 뜻한다. 바로 전에 경험한 성애의 즐거움을 떠올리며 그 느낌에서 떠나기 아쉬워하는 몸짓이 아닐까 싶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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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의 배 주위에는 이미 뜨거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배에 오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미 달콤한 쾌락을 맛본 연인들은 온몸을 밀착해 팔짱을 끼거나 끌어안고 있다. 사랑의 정령으로 보이는 천사들이 이들의 곁과 하늘에서 축하하며 배웅하는 중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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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평화와 행복의 근원으로서 쾌락</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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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7853"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1/IE003657853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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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토의 그림에서 성애를 통한 쾌락 추구는 개인적 욕구 충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조각상을 확대한 부분을 보면 아래에 활과 화살이 걸려있다. 쓸모없는 물건처럼 구석에 방치된 느낌이다. 활과 화살은 전쟁을 상징한다. 아프로디테이니 큐피드의 화살로 여길 사람도 많으리라. 하지만 여인 옆에 있는 큐피드 잘 보면 자신의 활과 화살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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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409">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임영열</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혈서로 새긴 네 글자, 안중근 태극기의 슬픈 비밀]]></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6984</link><pubDate>2026-08-15T11:54:21+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5994"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06/IE003655994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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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를 상징하는 표상(表象)은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는 국가 상징으로 태극기(國旗), 애국가(國歌), 무궁화(國花), 국새(나라圖章), 나라문장(紋章) 등 5가지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 상징은 국제사회에 한 나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국민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국가 형성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역사·문화·사상이 스며들어 국민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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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기는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 때 역관 이응준이 만들어 성조기와 함께 내건 태극기를 최초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박영효가 그해 9월 일본 수신사로 가면서 배 안에서 만들었다는 것보다 4개월 이상 앞선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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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인 1883년 3월 6일.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 문양과 4괘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하였다. 그러나 국기 제작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탓에 태극 문양과 4괘가 통일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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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광복 제81주년을 맞아 돌아보는 태극기</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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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5996"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06/IE003655996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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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월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그해 10월 15일에 '국기 제작법 고시'를 확정 발표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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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부터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와 의미가 담긴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상징적 문화유산이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2025년 말 현재 태극기 21점, 태극기 목판과 사적 등 6종이 국가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 중에는 보물로 지정된 태극기도 3점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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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광야에서, 거리에서, 옥중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독립을 염원했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광복 제81주년을 맞아 우리 선열들의 독립의지가 담긴 태극기 두 점을 살펴보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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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의병장 녹천 고광순과 '불원복' 태극기</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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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5997"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06/IE003655997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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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주년 3.1절을 며칠 앞둔 지난 2월 25일. 1986년부터 40년 동안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전시·보관하고 있던 태극기 1점이 유물 전용 차량에 실려 전남 나주시로 향했다. 전라남도가 의향 전남의 정체성을 조명하고 독립 운동과 의병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나주시 공산면에 새롭게 개관한 '남도의병역사박물관'으로 태극기를 이관하기 위해서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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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태극기는 전남 담양 출신의 녹천 고광순(鹿川 高光洵 1848~1907) 의병장이 1900년대 초반 구례와 지리산 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벌일 당시 직접 만들어 의병부대 군기(軍旗)로 사용한 태극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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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128cm, 세로 82cm 크기로 천 위에 태극 문양과 4괘를 다른 천을 오리고 덧대서 두 줄로 박음질하여 만들었다. 옆면에 마직물로 된 깃대 고정용 끈 3개가 달려 있다. 태극 문양 위에 붉은색 실로 '不遠復(불원복)'이란 세 글자가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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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5998"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06/IE003655998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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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6984">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이선필</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심형래 감독 '디 워' 역주행, 외신이 내놓은 분석]]></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205</link><pubDate>2026-08-15T12:04:04+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260"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2/IE003658260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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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333399'><strong>[방송계] </strong></font><strong>친일 논란 일파만파... 역사학자들도 의견 개진 이어가</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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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행적 논란에 배우 하영(안하영)의 이후 공식 활동도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14일로 예정됐던 드라마 &lt;이런 엿같은 사랑&gt; 인터뷰 취소는 물론이고, 게재된 광고가 내려가는 등 업계에선 강도 높은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논란이 불거졌던 지난 10일 이후 4일 만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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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하영은 7일 방영된 KBS2 예능 &lt;옥탑방의 문제아들&gt;에서 4대째 의사 집안임을 언급했고,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단체 활동 의혹이 나왔는데요. 10일엔 "사실무근"이라 대응했던 배우 소속사가 다음날 추가 자료 확인을 근거로 증조부 안상호가 1916년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올라 있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논란은 확산 양상을 보였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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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배우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12일 "일제강점기라는 뼈아픈 시간을 지낸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족사를 가볍게 언급했던 것을 반성한다"는 자필 사과문을 올렸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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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lt;한겨레&gt; 및 MBC 등은 추가 보도를 통해 안상호가 대정친목회 평의원으로 이름을 올린 데 이어,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추모준비위원회에도 참여한 기록을 공개했습니다. 이완용을 치료한 의료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사실도 다시 알려졌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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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이 "친일파라고 할 수 있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정도는 아니다"라고 전한 의견 또한 덧붙였습니다. &lt;연합뉴스&gt;는 14일 "안상호가 1904년 10월 교관으로 임명됐음에도 귀국을 거부했다가 석 달 뒤 해임됐다"며 국비 유학을 하고도 국가의 부름을 거부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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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lt;중증외상센터&gt;에서 천장미를 연기하며 인지도를 높인 하영을 두고 일각에선 과한 조치라거나 연좌제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배우 본인이 직접 가족사를 언급했다는 점,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둔 시점이라 더 뜨거운 논란이 됐다는 분석도 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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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도 의견을 더하며 논쟁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역사강사 배기성씨는 "일본에서 배워 와서 우리나라 발전에 기여하라고 했더니 (안상호) 본인은 일본화 된 사람이라 답했다"며 "(배우 하영) 그분 나이가 33세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도(안상호 관련 정보) 나온다"라고 비판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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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역사학자 심용환씨는 "대정친목회 자체가 친일 단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안상호의 구체적인 활동과 가담 정도까지 따져 친일파라는 규정을 신중하게 내려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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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205">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item><author>김형민</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3만 6500개 후보 중 현대의 첫 차가 될 뻔했던 이름]]></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771</link><pubDate>2026-08-14T14:51:15+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395"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3/IE003658395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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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333399'>"국내 최초의 한국산 승용차에 붙일 차명(車名)과 심볼 마크를 모집합니다. 해외 시장에서 쉽게 통용될 수 있는 이름을..."</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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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여름, 주요 일간신문에 대문짝만한 광고가 실렸다. 그해 가을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에 출품할 현대자동차 최초 독자 승용차의 차명 공모였다. 39일 동안 5만 8223명이 참여했고 3만 6500개의 이름이 등장했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것은 무려 887명이 제출한 '아리랑'. 휘닉스와 무궁화가 뒤를 이었다(권용주, "'아리랑' 될 뻔했던 현대차 '포니'", 한국경제TV, 2023년 5월 22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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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국산 모델의 이름은 '아리랑'으로 귀결되는 듯했다.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노래고 영어 발음도 부드러웠다. 그런데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다. "어, 그런데요. 차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면 어떡합니까." 모두가 경악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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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가사가 그제야 머릿속에 들어온 것이다. 십 리도 못 가 퍼지는 차? 상상하기도 싫었다. 결국 아리랑은 탈락한다. 온갖 궁리 끝에 현대자동차가 믿어 보기로 한 건 응모 엽서를 정리하던 여대생들의 감각이었다. 그들은 조랑말 '포니(Pony)'를 골랐고 현대 국산 차 1호의 이름은 포니가 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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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랑말의 발길질에 채였을망정 아리랑에 표를 던진 이들에게나 아리랑을 치워 버린 이들에게나 이 노래의 무게는 다르지 않았다. 아리랑은 구절양장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이 배우고 흥얼거리고 목청껏 불렀던 '민족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분단의 칼바람조차 이 노래는 가르지 못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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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재 아래 남북 단일팀 구성이 논의됐다. 남과 북은 티격태격했다. "국기는 무조건 태극기를 써야 한다"는 남한 측 주장을 북한이 받을 리 없었다. 그런데 가장 이의 없이 합의된 대목이 있었다. "단일팀의 국가(國歌)는 &lt;아리랑&gt;으로 한다." 남이건 북이건 거부감 없이 부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민족의 노래'였기 때문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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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이후 남북학생회담이 제기됐을 때 대학생들도 "우리 민요 &lt;아리랑&gt;을 부르자. 이렇게 '민족의 노래'를 서로 같은 시각에 부름으로써 하늘을 통한 동족의 호흡을 잠시라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lt;동아일보&gt;, 1961년 5월 14일). 관련 기사가 난 이틀 뒤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한낱 미몽으로 끝났지만 노래 &lt;아리랑&gt;의 위상을 보여주는 예이리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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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단일팀 국가로 아리랑을 택한 데 볼멘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lt;동아일보&gt; 칼럼은 아리랑이 "민족의 얼을 담뿍 실은 국민가요"임은 인정하면서도 남북 선수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가사를 부른다면 "좀 해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lt;동아일보&gt;, 1963년 1월 26일). 사실 좀 웃기지 않는가. 올림픽 금메달을 따서 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니.<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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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가장 큰 공헌자는 춘사 나운규</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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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tem><item><author>정남준</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사진] 사계절, 같은 자리에서 본 작은 포구]]></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125</link><pubDate>2026-08-14T11:52:28+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9012"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4/IE003659012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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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군 고현면 갈화리. 고향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이름을 굳이 불러보지 않아도 익숙한 작은 포구가 하나 있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좁은 길과 그 양옆에 매여 있는 작은 배들, 길 끝에 낮게 자리 잡은 집 한 채.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어촌의 풍경이다. 그러나 고향을 오갈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이곳에서는 발걸음이 멈춘다. 2015년 2월부터 최근까지 이 길을 지날 때면 습관처럼 카메라를 들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한 장씩 쌓인 사진에는 포구의 사계절뿐 아니라 그곳을 바라본 나의 시간도 함께 쌓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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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면 같은 포구도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봄날 비에 젖은 포구는 먼 섬들을 희미하게 감추고, 여름이면 짙어진 나무와 잔잔한 바다가 포구를 감싼다. 물이 빠진 날에는 넓은 갯벌이 모습을 드러내고, 겨울바람이 부는 날이면 작은 배들이 거친 물결에 몸을 맡긴다. 그중 겨울 풍경을 바라볼 때면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겹쳐진다. 눈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종종 보았던 눈 내린 겨울 풍경을 이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계절의 경계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사이, 카메라 속에 쌓여가는 풍경은 우리가 일상에서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시간의 변화까지 말없이 보여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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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삶은 늘 앞을 향해 달려가라고 재촉한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삶이다. 그런 일상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향하다 이 작은 포구를 만나면 마음의 속도가 잠시 느려진다. 바다와 배, 오래된 나무와 길 끝의 집은 계절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잘했는지 못했는지 따지지도 않은 채 돌아오는 사람을 그저 받아주는 곳. 그래서 내게 이 포구는 언제나 기다려주고 품어주는 엄마의 품을 닮았다.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도시에서 묻혀 온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게 하는 곳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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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풍경을 찍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장면을 수집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은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풍경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기록이 된다. 사람은 늙고 마을은 변하며, 바다와 계절의 표정도 달라진다. 같은 장소를 오랫동안 반복해서 바라보고 기록하는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을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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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tem><item><author>이선필</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호프' 위해 철물점 위치까지 외워... 무조건 한 테이크"]]></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905</link><pubDate>2026-08-14T11:50:54+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107"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2/IE003658107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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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arget="_blank" href="https://omn.kr/2jc0p"><font color='#333399'>[그 장면, 이 사람] 영화 &lt;호프&gt; ② 기사에서 이어집니다.</font></a> (<a target="_blank" href="https://omn.kr/2jc0p">https://omn.kr/2jc0p</a>)<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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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lt;호프&gt; 속 외계 존재들의 종횡을 가로지르는 움직임, 배우들의 앞뒤로 쏟아지던 각종 총탄 효과는 바로 이 사람 손끝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 아니다. 올해로 28년 경력의 홍장표 특수효과 감독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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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한창 상영 중인 11일 오후 서울 안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나홍진 감독 사단이라 할 수 있다. &lt;황해&gt;(2010)부터 나홍진 감독과 호흡을 맞춰온 걸로 알려졌지만, 사실 첫 인연은 &lt;추격자&gt;(2008)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참여 제안을 받았음에도 다른 작품 일정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편 &lt;페이스&gt;(Faith, 2023)에 이어 &lt;호프&gt;는 나 감독과 세 번째로 협업한 결과물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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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996633'>"피 튀기는 장면 하나만 보고도 우리 같은 사람은 안다. 정말 집요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lt;추격자&gt;를 뒤늦게 보고 이분 영화엔 꼭 참여하고 싶었다."</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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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여러 액션, 재난 블록버스터에 참여했음에도 그는 "&lt;황해&gt; 때 트레일러 차를 쓰러뜨릴 때도 그랬고, 뵐 때마다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걸 하자고 하니 긴장할 수밖에 없다"며 &lt;호프&gt;에 참여했을 당시 기억부터 전했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숲에서 말과 함께 내달리는 장면, 성기(조인성)가 말에서 경찰차로 옮겨타는 장면은 당연히 CG(컴퓨터 그래픽)로 할 것이라 생각했다"던 그는 "역시나 예상을 깼다. 모든 걸 실제로 촬영하자 해서 고민하며 준비하기 시작했다"며 웃어 보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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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관객의 장면] 성애의 유탄 발사... 외계 존재를 돌려 세우다</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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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124"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2/IE003658124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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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가상의 마을 호포항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외계 존재들과 마을 사람들의 사투에는 여러 액션 명장면이 등장한다. 그중 성애(정호연)가 경찰차를 몰고 나타나 범석(황정민)을 구한 뒤 바미기르(카메론 브리튼)를 향해 유탄을 발사하는 장면은 그 반응이 더욱 컸다. 지난 5월 제79회 칸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상영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자 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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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유탄은 홍 특수효과 감독의 고민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영화에 등장한 AK소총, M16 소총에 대해 그는 "소품팀에서 현지 총기 규제 때문에 루마니아에서 어렵게 공수한 것들이었고, 우린 영화적 효과를 위한 유탄을 직접 만들어야 했다"며 설명을 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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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tem><item><author>김수</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한 팔 잃고도 태극기를 놓지 않았던 윤형숙 열사]]></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9027</link><pubDate>2026-08-14T09:31:55+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905"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3/IE003658905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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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시위대 맨 앞에는 태극기를 든 한 소녀가 있었다. 여수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나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다니던 윤형숙 열사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8세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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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이 윤형숙 열사의 왼팔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는 태극기를 놓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고쳐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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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팔을 잃는 고통도, 이어진 옥고와 고문도 그의 뜻을 꺾지 못했다. 윤형숙 열사는 혹독한 고문으로 한쪽 눈의 시력마저 잃었지만,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신념과 이웃을 향한 사랑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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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숙 열사의 행동은 단순히 한 사람의 용기만을 보여준 사건이 아니었다. 일제의 폭력 앞에서도 독립을 향한 민중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했다. 특히 여성과 학생도 역사의 주변인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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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tem><item><author>유지영</author><category>문화</category><title><![CDATA["이제 누가 '네 속도로 세상에 맞서라'고 해줄까" 마지막 된 '안판석'이라는 장르]]></title><link>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970</link><pubDate>2026-08-13T18:02:41+09:00</pubDate><description><![CDATA[<div align="center">    <img align="center" id="IIE003658644" src="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813/IE003658644_STD.jpg" style="max-width: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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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하고 날카로우면서 따뜻하고 섬세하다.", "예리하면서도 담대하다." 고 안판석 감독의 작품은 이렇듯 전혀 상반된 것 같은 형용사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유영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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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거장' 안판석 감독이 12일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드라마사에서 너끈히 하나의 장르가 됐던 '안판석 드라마'는 오는 10월 유작인 &lt;연애박사&gt;를 끝으로 더는 볼 수 없게 됐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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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5년 폐암 진단을 받은 안 감독은 최근 뇌출혈이 겹치며 투병해오다 이날 오후 사망했다. 그는 투병 중에도 &lt;연애박사&gt; 연출을 이어오며 현장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현재 &lt;연애박사&gt;는 촬영과 편집을 모두 마친 상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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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난 2018년 &lt;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gt; 기자간담회에서 "인간의 마음을 좋게 바꾸려고 하는 드라마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날 그는 취재진 앞에서 "(그런 드라마에) 사명감이 있다. 내가 언제까지 (드라마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힘을 합쳐 같이 소중히 가꾸었으면 한다"고 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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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과거 함께 일했던 드라마 감독과 그의 드라마를 사랑한 '후배' 드라마 감독들과 대중문화 평론가에게 안판석 감독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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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안 감독과 초기작 함께한 드라마 감독의 전언</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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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감독은 1987년 MBC PD로 입사해 꾸준히 드라마를 만들었다. &lt;고개 숙인 남자&gt;(1991)를 통해 드라마 연출가로 데뷔했으며, &lt;짝&gt;(1994)을 만들었다. 그를 하나의 장르로 만든 건 &lt;하얀거탑&gt;(2007)이다. &lt;하얀거탑&gt;은 병원을 무대로 한 치밀한 정치와 욕망의 드라마를 완성해냈다고 평가받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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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안 감독은 안주하지 않고 박차를 가해 &lt;아내의 자격&gt;(2012), &lt;세계의 끝&gt;(2013), &lt;밀회&gt;(2014), &lt;풍문으로 들었소&gt;(2015), &lt;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gt;(2018), &lt;봄밤&gt;(2019), &lt;졸업&gt;(2024), &lt;협상의 기술&gt;(2025)을 완성시켰다. 여기에 &lt;연애박사&gt;까지 14년 동안 무려 9개의 드라마를 연출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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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장미와 콩나물&gt;(1999) 조연출로 안 감독과 인연을 맺은 고동선 전 MBC 드라마국 국장(&lt;내조의 여왕&gt; 연출)은 13일 &lt;오마이뉴스&gt;에 안 감독을 '판석이 형'으로 부르며 애도했다. 고 전 국장은 "상실감이 크다. (안 감독은) 작가, 배우, 후배 연출가를 성장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며 "의견 차이가 있어서 싸우다가도 껄껄 웃으면서 '너는 내 지음(知音)'이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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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8970">전체 내용보기</a>
]]></description></item></channel></rss>